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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2-05-27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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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에 온 여승(女僧)-10

기사입력 2022-01-26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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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운명의 그림자

석양에 온 여승(女僧)-10

 

청관 스님의 일을 계기로 친정 어르신들을 통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 들을 들은 바가 많았는지, 박씨 부인은 시집의 어른들이 도모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중산 이상으로 이미 알 만큼은 다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임오군란의 잔재인 승당 할아버님의 과거사 문제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까닭도 청관 스님의 모자가 던져 주는 부담감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어려움에 봉착한 왕조복원 사업 문제 때문이라는 말씀이오?”

, 서방님. 이것은 아녀자의 좁은 소견입니다만, 저의 친정아버님께서 우리를 따로 불러 임오군란과 얽혀 있는 청관 스님의 출생에 관한 비밀 얘기를 은밀히 해 주신 것도 사실은 그 당시에 피눈물로 얼룩진 여러 가지 문제들 중에서 용화 할머님이나 시아버님께서 직접 해결하려고 팔을 걷어붙이고 전면에 나서기에는 남들의 이목도 있고 하여 여러 모로 어려운 부분이 있을 수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다음 세대들인 저희들이 대신 그 해결책의 실마리를 한번 찾아보게 하려고 청관 스님을 만나도록 각별히 권하신 게 아닌가 싶은데, 서방님의 생각은 어떠하온지요?”

밤은 점점 더 깊어만 가는데 집 뒤의 동산에서는 옛날에 죽은 촉나라 망제(望帝)의 넋이라고 전해지는 두견이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젊은 그들 종손 부부는 왕조복원 사업에 매달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용화 부인과 영동 어른의 엄명으로 그 문제에 대해서는 감히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청관 스님 모자와 관련하여 필운 선생이 던져 준 숙제를 앞에 놓고 지금 당장 무엇이 문제가 되며, 또한 그 해결책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렇게 골몰하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중산이 비로소 입을 연다.

용화 할머님께서 국권을 회복하는 일만큼 우리한테 화급하고 지중한 문제는 없다고 입버릇처럼 늘 말씀하셨으니까, 청관 스님 모자의 문제도 그 일과 깊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나도 들기는 하오. 하지만 당신네들이 하고 계시는 일에 대해서는 알아서는 안 되고 아예 알려고도 하지 말라며 내린 단속이 지엄하기 이를 데 없으니 이거야말로 소경의 술래잡기 형국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러자 박씨 부인은 갑자기 진지해지는 얼굴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조심스레 드러내는 것이었다.

서방님. 그런데 청관 스님의 얘기를 전해 주었다는 무릉 선생은 어떤 분이시며, 또 무슨 까닭으로 하필이면 사돈지간인 우리 친정아버님께 임오군란과 관련된 승당 할아버님의 과거사 얘기를 해 주신 거라고 생각하시는지요?”

, 그야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그리하셨을 수밖에요! 무릉(武陵) 안익규(安益圭) 선생이라면 우리 밀양 유림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원로 유학자 중의 한 분으로서 단장면(丹場面) 태룡리(台龍里)의 유서 깊은 고촌인 태동(台洞) 부락의 터주대감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해마다 표충사 표충서원의 춘추 봉향대제 때마다 밀양 유림 측을 대표하여 사찰 측과 함께 집례를 맡아 보게 된 것이 아니겠소? 더구나 우리 승당 할아버지, 운곡 처조부님과 함께 동문수학한 절친 삼인방 중의 한 분으로서 승당 할아버지의 유지에 따라 청관 스님을 표충서원에 위패를 모신 사명대사의 직계 법손이 되도록 주선을 해 주신 장본인이시라니 오죽했겠소?”

그렇다면 무릉 선생께서 그동안 승당 할아버님께서 순절하신 후 거의 십 년이 다 되도록 일체를 함구하고 계시다가 뒤늦게 임오군란 때 반란군의 여식으로 관노로 전락한 하녀의 몸에서 난 승당 할아버님의 핏줄이 표충사 근처의 은거지에서 하인 행세를 하며 시봉을 받들다가 할아버지 순절 후에 곧바로 입산하여 청관 스님이라는 청년 학승이 되었다는 것과, 성 안의 무봉사 절에 와 있다는 사실을 우리 친정아버님께 알려 주신 까닭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 건가요?”

글쎄요. 그야 승당 할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호국의 명승인 사명대사의 법손이 되도록 주선해 준 떠꺼머리 서출 자식이 출중한 청년 학승이 되어 다시 나타난 것을 보고 생각하신 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소? 더구나 태룡리의 광주 안씨(廣州 安氏)라 하면 조선 헌종 때에 만포 (晩浦) 안유중(安瑜重), 성재(省齋) 안정중(?), 괴천(槐泉) 안수중 (安琇重) 등 세 형제들이 부북면(府北面) 전사포리(前沙浦里)에서 그곳으로 이거하여 정착한 후에 단연정(亶然亭)이란 제사(齋舍)와 서당을 짓고 자손들에게 학문과 가업을 장려하여 대대로 큰 인물들을 배출 해 온 명문 호족인데, 그 집안의 큰 어른이시니 아무래도 나랏일과 관계되는 무슨 큰 뜻이 있었기에 그리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오마는.”

중산의 입에서 그런 얘기가 줄줄 흘러나오자, 박씨 부인은 부창부수의 모범을 보일 심산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무릉 선생 집안에 관한 말을 이어 간다.

, 그 집안의 시헌(時軒) 안희원(安禧遠) 선생이라는 분은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여러 벼슬을 지낸 후에 고종 28(1891)에 승정원 동부승지를 사직하고 귀향하였다가 광무 7(1903)에 관찰사 박제흥(朴齊興)의 주천으로 비서원승(秘書院丞)을 겸하여 장례원(掌禮院) 장례(掌禮)에 제수된 바가 있었지요. 그 뒤, 그 분은 갑신정변 때 청나라 장수 원세개(元世凱)가 우리 고종 황제 폐하께 독대를 청하였다는 말을 듣고 분개하여 황제 폐하께 진언하기를, ()의 공이 비록 중하지만 외국의 사신이고 신 등은 못났어도 내신 (內臣)인데 어찌 외신(外臣)과의 독대를 용납하겠느냐며 물러가지 아니하였고, 나라가 망하자 융희처사(隆熙處士)로 자처하며 두문불출하며 지금도 부북면 삽포(사포리)에서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전집 간행에 전념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정대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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