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마지막 의자왕 ‘살해사건’
 
 [2019-08-23 오후 4:30:22]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 마지막 의자왕은 어떤 인물이었나? 김홍정 신작 소설 의자왕 살해사건은 제목부터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대륙을 향한 백제인의 비원, 추리 기법으로 묘사한 의자왕 살해사건에서 알게 된 작가적 상상력을 펼쳐보기로 한다.

백제 패망의 책임을 은고라는 한 여인에게 돌린 사서의 기록에서 영감을 얻어 360쪽이 넘는 장편을 쏟아낸다. ‘의자왕 살해사건은 사실을 의미하는 팩트와 소설을 뜻하는 픽션의 결합어,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을 가미한 글쓰기 장르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절요에는 백제 영웅들의 영혼이 안장된 오합사를 능멸한 흰 여우에 대한 기록이 전하고, 일본서기에는 의자왕이 패악하고 부인 은고가 요망 무도해 백제가 멸망했다는 기록에서 작가 김홍정은 어릴 적부터 백제의 역사를 깊이 있게 풀어보고 싶었다고 한다.

백제의 몰락이란 엄청난 사건의 원인이 왕과 왕비의 성정(性情)에서 찾았다는데, 그것은 역설적으로 들여다보면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이 거슬리게 저항한 사항을 마음대로 기록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보는 것이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작가 김홍정에게 600년 백제는 어머니 같은 고향의 존재였다. 공산성에서 뛰어 놀며 그는 역사에서 배운 백제가 무력하게 쓰러져간 최후의 날들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그는 백제 후예로 신작 소설 의자왕 살해사건을 통해 제국의 장려(壯麗)한 낙일(落日)에 바치는 작가의 헌사(獻詞)인 셈이다. 역사가 승자의 시각에서 기록되고 해석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백제 역시 예외가 아니다. 고구려와 왜()가 긴밀히 협력하고 신라와 대적했던 백제의 역사는 후대에 들어 의자왕과 삼천 궁녀따위의 가당치 않은 후일담 수준으로 왜곡되고 축소되었다고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서기 6606, 남부여가 서라벌의 군사지원을 받은 당나라 13만 대군에게 패한 뒤 벌어진 일이다. 백제 패망과 관련해 전하는 사서의 기록은 대왕 의자와 처 은고, 아들 융이 신하, 백성들과 함께 낙양성으로 끌려가 그해 겨울 병들어 죽었다는내용이 전부다. 그래서 작가는 그 이후의 이야기를 상상력으로 풀어낸다. 소설은 낙양성으로 압송된 해 겨울 병들어 죽었다라고 전하는 의자왕의 미스터리한 죽음을 역추적해 가는 스릴러형식을 취한다.

백제 멸망 이후 의자왕의 아들 여풍이 백제 부흥 운동을 이끌게 되기까지 막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진 것인지를 비밀 무사 집단 거믄새및 백제의 마지막 왕비 은고를 중심으로 박진감 넘치게 풀어낸다. 사서에 요망 무도한 인물로 묘사된 백제 마지막 왕비 은고는 소설 속에서는 백제의 운명을 손에 쥔 강하고 매혹적인 여걸로 재탄생된다. 소설 속 은고는 노회한 귀족들을 견제하고 젊은 장군들을 기용해 왕권을 강화하는 대개혁을 이끌어간다. 화검술을 겸비한 대담한 책략가이다. 사랑과 대의 사이에서 신념을 좇는 능동적인 여성이기도 하다. 자신감 넘치는 조선 중기 여성상을 그려냄으로써 운명과 담대히 맞서는 진취적 여성 주인공 상을 제시하고 있다. 660년 여름, 당의 장수 소정방과 서라벌 장군 김인문이 이끄는 13만 대군이 덕물도로 침략하며 남부여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포로로 끌려간 낙양성에서 은고는 대부여의 혼을 지키고자 결성된 비밀조직 거믄새와 함께 패망한 백제 부흥을 위해 계략을 짜기 시작했는데 끝까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은고는 자기 손으로 아끼던 여고야를 검으로 베고 낙양성 빈해궁으로 돌아갔다.

은고는 대왕과 자신의 수라상을 차렸다. 한 그릇의 흰밥과 맑은 국, 새우젓과 계장, 짠지, 맑은 술 한 잔. 은고는 대왕의 국과 술, 자신의 국과 술에 아미에게 받아두었던 약을 탔다. ‘어라하, 어서 드시지요’ ‘부인, 사비성 원지 별궁에서 먹던 음식이오. 나는 늘 이 음식이 편했오아무것도 모르는 의자왕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겸상을 했다. 다시 눈이 내리고 폭설로 변한 다음 날 당 고종은 백제 대왕 의자와 대부인 은고의 부음을 들었다. 당 고종은 의자왕이 백제가 망하던 해 660년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고 발표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위위경(衛尉卿)의 벼슬을 추증했다고 한다. 그의 장례에 백제에서 끌려온 옛 신하들이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고, 낙양성 북망산에 묻게 했다. 또한 의자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사비성에도 알렸다. 남부여 전역에서 부흥군이 일어났다. 소식을 들은 왜왕 사이메이는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661년 남부여 대왕으로 추대된 여풍에게 일만 오천의 군사를 내주었다. 여풍은 3년 동안 부흥군을 이끌었다. 당나라 장수 방효태는 6622월 사수(蛇水)에서 고구려 군사에게 패하여 군사 오천을 잃었고, 아들 13명과 함께 함께 무수한 화살을 맞고 온 몸이 고슴도치가 되어 죽었다. 여풍은 3년 후 백강에서 나당 연합군과 싸워 패했으나 물러서지 않았다. 이후에는 고구려 군사와 함께 당에 맞서 싸웠다. 667년 소정방은 싸움터가 아닌 조령 인근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또한 김유신이 소정방의 머리를 당교 아래 묻었다고 하였으나 백제군이 그를 죽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말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