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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소울 푸드

[2021-02-24 오후 6:15:20]
 
 
 

하늘은 언제나 높고도 먼 곳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콧대 높은 싸늘함으로 냉정을 유지하면서. 나의 오만가지 사념들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어제는 쌀을 정성껏 씻어 밥을 지었다. 하얗게 윤기가 흐르는 햅쌀밥을 보니, 코로나 사태로 휴가도 오지 못하고 있는 막내아들 녀석이 무척 그립다. 김치를 만들어 밥 위에 올려주면 입을 크게 벌려서 받아먹던 모습. 녀석은 젓갈향이 물씬 나는 시뻘건 생김치를 특히 좋아한다. 속이 보드라운 알배추 김치는 가위질을 하지 않고 손으로 쭉쭉 찢어 먹어야 제 맛인 줄을 아는 전형적인 경상도 입맛이다. 녀석도 없는데 홀로 밥상이랄 것도 없이, 밥만 한 공기 떠서 김치를 놓고 허기를 달랜다.

생각해보면 즐거운 식사 시간만큼 사람을 가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을까. 사랑과 관심의 거리, 딱 그만큼이 식사 시간 맛의 거리가 아닐까. 서투른 솜씨로 아무렇게나 뜯어온 밤식빵 위에, 피넛 버터를 발라 먹어보라며 건네던 수줍고도 어색했던 미소와의 추억을 나는 늘 가슴에 품고 있다. 그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의 절묘하고 애틋한 사랑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쌀쌀해지는 날씨에 걸맞는 제철 음식으로는 무엇보다 라면이 으뜸이라고 했다. 경치가 좋은 편의점에 들러 컵라면을 사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앉아서 먹는 꼬들꼬들한 면발과 국물의 맛은 허한 속을 달래주기에 안성맞춤 제철음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뭐니 뭐니 해도 겨울철의 제철음식이라면 라면을 첫손에 꼽는다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 실로 짐작이 가는 소울 푸드라 할 만하다. 몹시 바람이 부는 추운 겨울 어느 날에 나도 한 번 따라 해보고 싶다. 옷깃을 세우고 머리칼을 흩날리며 쓸쓸히.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라는 수필집에도 라면 고수의 비법이 나온다. 육군에 갔더니 라면이 밥보다 인기가 높을 뿐만 아니라 기동훈련이나 유격훈련, 국군의 날, 심지어 축구시합 후의 특식도 라면을 선호하더라니, 라면이라는 음식이 갖는 의미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인스턴트식품인 라면이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소울 푸드가 되기도 한다는 것. 입맛이란 그토록 유별나고도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나도 어릴 적에 라면을 한개만 끓여서 외할머니하고 호호 불면서 나누어 먹었던 기억이 따스하게 남아 있다. 수삼을 곱게 갈아 재운 꿀을 한 숟갈씩 입에 넣어주던 일. 쪄서 말린 밤을 오물오물 녹여 먹었던 기억. 외할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음식들은 지금도 나의 영혼을 치유해주는 명약이 되고 있다.

과연 맛은 화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정서적 현상이라는 말에 공감을 하게 된다. 정서적으로 지나치리만큼 하일리 센시티브 피플(Highily Sensitive People)임을 자처하는 내가 유독 맛감각에 예민한 것도 논리적으로 해명이 가능해지는 셈이다.

활전복을 툼벙툼벙 썰어 한 접시, 미더덕을 듬뿍 넣은 된장찌개 밥상을 유독 좋아하는 나의 소울 메이트와 이 겨울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기고 싶다. 코로나 사태로 봄도 여름도 가을도 잃어버렸던 2020년을 다시 소환할 수는 없겠지만, 2021년 새해로 이어져온 이 겨울만이라도 나만의 소울 푸드와 함께 기억에 붙들어놓고 싶다. 오래 오래 지워지지 않는 무늬를 새겨놓고 싶다.

홀로 남은 어머니와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이 겨울을 이겨내고 있다 보니, 그리움과 아쉬움이 가슴에 사무쳐 모든 것이 낯설고 막막하다. 그래서일까 더욱 자주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다음으로 미루기만 하다가 어디론가 달아나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봐 무섭고, 갑작스럽게 내가 이 모두를 두고 떠나게 될까봐 두렵다. 돌이켜보면 야속했던 것은 지나간 세월이 아니라, 소중한 인연들을 무심히 흘려 보낸 나 자신이었음을 통절히 깨닫는 요즘이다.

 

정희숙/(사)기회의 학숙 총무이사,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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