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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평형수

[2021-04-23 오후 3:10:36]
 
 
 

이른 아침 봄의 뜰에 가만히 서서 사방을 둘러보라. 해뜨기 전에 흰 구름이 앞산을 먼저 넘어오고 화려한 녹색의 향연이 축제처럼 펼쳐진다. 그뿐이랴 어느 쪽에서 다가오는지 알 수 없는 여리고 애잔한 꽃향기에 정신이 아득하다. 봄의 아침은 보는 재미도 크지만 싱그러운 자연의 향기에 취해보면 기쁨도 두 배가 된다. 봄날은 이렇듯 온통 기쁨이요 설렘이다. 이렇게 좋은 계절에 우리는 봄이 안겨다 주는 작은 기쁨하나라도 놓치지 말고 모두 가슴속에 가득가득 쌓아두어야 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여름과 쓸쓸한 가을, 그리고 차갑고 메마른 겨울까지 조금씩 꺼내 쓰기 위해서다. 봄이 주는 이러한 즐거움이 예고된 것이듯, 살아가면서 우리가 맞이하는 기쁨은 보통 예정된 것이다. 갑자기 나타나는 기쁨은 그야말로 행운이다. 그러나 슬픔과 고난은 경중을 가릴 것 없이 어느 순간 예고 없이 찾아와 우리의 삶을 엄습한다. 기쁨은 그냥 즐겁게 맞이하면 되지만 갑자기 찾아오는 슬픔이나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평소에 내면의 면역력을 키워두어야 한다. 마음의 창고에 기쁨의 양식을 넉넉하게 쌓아두는 사람은 갑자기 맞이하는 충격이나 고난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즐거움과 행복은 조금은 다르다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그냥 같은 의미로 생각해도 될 것이다. 즐거움이 많으면 행복한 삶이 될 것이고 행복한 사람은 즐거운 생활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같은 일을 두고도 무척 즐거워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 느낌을 갖지 못하고 넘겨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소확행의 의미를 자주 말하는지도 모른다. 행복한 사람은 작은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다. 작은 즐거움이 모여서 큰 즐거움이 되고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랑겔한스 섬의 오후에서 소확행(小確幸)’이라는 말을 처음만난 듯하다. 요즘은 그냥 유행처럼 회자되는 말이기도 하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봄볕이 따사로운 쪽마루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것, 5만 원짜리 사과나무 한 거루를 사 와서 내 뜰에 심어보는 것, 가족처럼 거두는 강아지와 마을 뒷길을 산책하는 것, 오랜만에 온 자식들과 같이 밥 먹으며 식구들이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 아내와 둘이서 시골의 5일장에 가서 국밥 한 그릇 먹고 시장 구경하는 것. 이런 것들이 보통사람인 우리들의 소소한 행복이다. 사람마다 작은 즐거움에 대한 생각에는 물론 차이가 있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작은 즐거움 하나라도 놓치지 말고 즐거워하면서 그 느낌을 가슴속에 잘 쌓아 두어야 한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듯 마음이 고프면 기쁨의 양식을 보충해야 한다.

넓은 대양으로 항해하는 큰 배들은 밑바닥에 평형수라는 물을 채운다. 평형수는 조류나 파도에 의해 또는 갑작스러운 회전으로 배가 많이 흔들리거나 기울 때 복원력을 발휘해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평형수를 충분히 채우지 않은 배는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한쪽으로 기울게 되면 중심을 잃고 뒤집어져 큰 재앙을 몰고 올 수 있다. 사람의 내면에 가득 채워진 기쁨의 양식은 선박의 평형수와 같다. 평소에 크고 작은 즐거움들을 한껏 받아들여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찬 사람은 갑자기 다가오는 슬픔이나 고난에 쉽게 무너지지 않고 곧 평상심을 되찾을 수 있다. 한편 평형수는 배터리와도 같아서 사용하기만 하고 재충전하지 않으면 어느 날 갑자기 일상적인 모든 삶이 멈추어 서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의욕이 충만해서 하는 일이 많을수록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게 된다. 이는 기계의 원리와 다를 바 없다. 의욕적으로 일할 나이가 지난 것 같은데도 스스로를 바쁘게 몰아치는 사람들은 항상 말한다. 바쁘다고. 바빠서 정신이 없다고. 그러면서 자신의 능력을 은근히 과시한다. 인생은 나이와 상관이 없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없지만 또 전적으로 동의할 수도 없다.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만큼 삶에 필요한 에너지를 재충전 할 시간을 확보는 것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K 씨는 타고난 사업가였다. 사람의 성향을 잘 파악하여 많은 이들과 가까이 지냈고, 이러한 친화력이 바탕이 되어 사업도 크게 번창했다. 칠십의 중반이 된 작년까지만 해도 사업과 동시에 여러 가지 사회활동을 열심히 해왔다. 그는 언제나 바쁜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냥 집에서 아내와 가정부의 도움을 받으며 하루 종일 넓은 창밖을 바라보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의 전부다. 우울증을 잠시 앓다가 지금은 치매까지 찾아온 상태다. 그는 항상 사업 관련 일이나 사회적 활동에 매달렸다. 우리가 말하는 소확행은 전혀 다른 사람들의 일이었다. 얼마 전 위문 차 그분의 집을 방문했을 때 사모님께서 이렇게 얘기 했었다. “우리 집 양반은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들에 혼자 매달렸습니다. 사업도 그렇지요. 자기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처럼 생각했어요. 가족들이랑 좋은 시간 한 번 가져보지도 못했어요. 평생 옆에 있어준 아내와 좋은 곳에서 단둘이 밥 한 번 먹어본 적도 없어요. 지금도 무엇이 정말 소중한 것인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불쌍하기도 하고 참 밉기도 합니다.”

그 날 나는 생각했다. ‘K 씨의 가슴에 소소한 작은 즐거움의 에너지가 가득 채워져 있었더라면 우울증이나 치매가 그토록 갑자기 찾아오지는 못했을 것인데.’ 라고. 여유, 작은 즐거움, 이런 것들로 꾸준히 충전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도 번아웃(Burnout)된다. 우울증에 걸리거나 크고 작은 고난 앞에 쉽게 허물어지는 것도 행복의 평형수를 제 때 충전해주지 않고 마냥 퍼내서 사용만 한 결과일 수 있다. 평형수가 고갈된 상태로 인생의 험난한 바다를 무사히 건널 수 있는 배는 한 척도 없다.

 

정상진/前 밀양초등학교 교장, 한국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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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환 소중한 것은 항상 그것을 잃은 후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현재 내 곁에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나 생각하며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만큼 평형수를 보충해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1-04-30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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